제목   |  North’s ultimate torture: No love 작성일   |  2012-02-29 조회수   |  2988

North’s ultimate torture: No love

Born in a prison, defector describes a life denied of relationships, emotions
北 수용소, 육체적 고문보다 끔찍한 '표창결혼'  

Feb 29,2012
 
  Defector Shin Dong-hyeok protests outside the Chinese Embassy in Seoul yesterday. By Ahn Seong-shik

Shin Dong-hyeok, a 30-year-old North Korean defector who was born in a political prison camp and spent his first 24 years behind its walls, said the most inhumane policy in the camp was a ban on any kind of personal relationship or emotion, especially love.

Shin protested yesterday in front of the Chinese Embassy, central Seoul, against the Chinese government’s likely repatriation of dozens of North Korean defectors arrested in their territory earlier this month. Their exact number is not known, and Beijing has turned a deaf ear to calls from around the world not to send them back to North Korea.

 
   
Shin and other defectors in the South predict they will be executed or forced into hard labor in prison camps as punishment for escaping North Korea.

Shin is thought to be the only person in South Korea who was born in a prison camp in the North.

   
   
He started his life in Camp No. 14 in Kaechon, South Pyongan Province.

At the camp, Shin said, authorities rewarded some well-behaved prisoners by allowing them to cohabit in a cell for five days ahead of the birthdays of North Korean founder Kim Il Sung or his son, the late leader Kim Jong-il. Shin says he was conceived during one of these five-day forced unions.

But the male and female prisoners were separated after the five days and not allowed any further relationship.

“There were 10 rules in the prison, and one of them was, ‘Don’t have any personal relationship with a member of the opposite sex,’?” Shin said. “I didn’t understand what love, friendship or family meant at the time, which are the principal emotions of human beings.”

Shin said he lived with his mother until he was 11 years old, when they were forcibly separated.

At the age of 14, his mother and elder brother were executed in front of him for trying to escape. Authorities forced him to read out the charges before they were shot to death.

Because of their sins, Shin and his biological father were dragged to an underground prison and tortured with iron rods heated in a fire. Shin still has a large scar on his back from the torture, which crippled his father.

Shin decided to escape in 2005, when a prisoner from Pyongyang told him about life in the capital city.

“He told me he ate hot chicken dishes and rice mixed with beans [before he was arrested],” Shin said. “I had always eaten humble soups of corn. After he told me about the chicken dishes, I dreamed of them every night.”

He and the prisoner from Pyongyang tried escaping by climbing over an electrified fence. The other prisoner couldn’t withstand the electric shock. Shin crossed the Tumen River into China and arrived in the South in 2006.

“When I was in the North, I didn’t know what emotion was, and the only emotion I had was fear,” Shin said. “It was all kinds of fear: fear of being hit, starved, tortured and of dying.”

In the South, Shin works for a human rights organization that helps defectors fly from China to the United States. A book about his life, “Escape from Camp 14,” will be published next month.


By Lee Won-jean [hee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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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수용소, 육체적 고문보다 끔찍한 '표창결혼'

먹고 살려고 어머니 죄 고발… 형은 내 눈앞에서 공개 총살
정치범수용소서 태어나 24년 살다 탈북한 신동혁씨

남녀의 사랑, 아이의 출생조차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선 ‘계획관리’에 포함된다. 남녀 모범수를 골라 합방시켜 애를 낳게 하는 ‘표창결혼’이 그것이다. 이런 식으로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 탈북에 성공한 신동혁(30)씨가 28일 탈북자 인권에 대해 입을 열었다.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 가운데 정치범수용소의 ‘표창결혼’으로 출생한 이는 그가 유일하다.

 그는 완전통제구역인 평안남도 개천시의 ‘개천 14호 관리소’에서 태어났다. 출발부터 정치범으로 낙인찍힌 채 24년을 살다가 2006년 탈출했다.

 이날 중국대사관 앞의 탈북자 강제북송 반대시위에 참석한 신씨는 정치범수용소의 육체적 고문보다 더 끔찍한 인권유린은 ‘감정 고문’이라고 했다. 신씨는 ‘표창결혼’을 그 사례로 들었다. 노동사역을 잘하고 일에 지각하지 않고, ‘생활총화(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게 하는 자아비판의 장)’에 열심히 임한 모범수 남녀를 김일성이나 김정일 생일 때 골라 5일 정도 같은 방에서 동거시켜 아이를 낳게 하는 제도다. 2명의 간수가 한 수용소 안에 2500명 정도의 수감자들을 감독하는데 합방할 짝은 오로지 간수에게 간택된다. 신씨는 “정치범수용소 10대 원칙에 남녀 접촉 금지가 있는데 표창결혼은 이를 유일하게 허용하는 창구”라며 “그런 환경에서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가족, 사랑, 우정 같은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14살 때인 1996년 어머니와 7살 위의 형이 탈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눈앞에서 공개처형(총살) 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는 “먹고살기 위해 생활총화에서 어머니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며 “그 죄책감으로 평생을 시달릴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신씨는 이 사건으로 지하감옥에 끌려가 불고문을 받아 아직도 등에 흉측한 화상 흉터를 갖고 있다. 아버지도 고문으로 움직일 수 없는 불구가 됐다. 주머니에 밀알 다섯 알을 숨기다 들킨 여자 아이가 아침부터 점심 때까지 머리를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도 봤다.

 수용소 내 피복공장 수리작업반에서 일했던 신씨는 2005년 40대 후반의 평양 출신 태권도 사범을 만나면서 탈북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를 통해 수용소 밖의 생활에 대해 난생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종종 제게 찐 닭을 결을 따라 뜯어먹거나 콩비지에 밥을 비벼 먹던 시절을 흘려가듯 얘기했어요. 매일 강냉이죽만 먹던 저는 꿈을 꿔도 계속 닭다리가 나타나더라고요.” 6개월간 먹을 것을 상상하며 몽환에 휩싸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전기철조망을 넘었다. 국경을 넘어 중국에 도착했다. 같이 탈출하려던 태권도 사범은 감전돼 죽었다.

 그는 “매 맞는 공포, 굶주림의 공포, 고문의 공포, 죽음의 공포를 제외하면 다른 감정을 아예 알지 못했다”며 “한국에 와서 지금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탈북 이후 신씨는 미국 LA의 탈북자 지원단체인 ‘링크(LiNK)’에서 2년간 일하며 60명가량을 중국에서 미국으로 망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는 29일 오후 2시부터 아프리카TV(www.afreeca.com)에서 북한의 수용소 생활과 인권유린 실태를 전할 계획이다. 다음 달 29일엔 미국에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정치범수용소에서의 탈출(Escape from Camp 14·사진)』을 출간한다.(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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